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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만 있는 글

잠깐 들려서 읽고 가는 글2

by chobo&시작하는 블로거 jelly03 2020. 5. 8.

코스모스

베란다의 화분에서 코스모스 싹이 났습니다. 처음에는 줄기가 비실비실 힘없이 태양을 갈구하며 몸부림 쳤지만, 일주일이 지난 지금은 강풍에 몸을 심하게 흔들면서도 곧게 위로 키를 키워가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현관 앞의 자그마한 정원에서 꽃을 길렀습니다. 봄에는 나팔꽃. 뻗은 덩굴이 지붕까지 닿아, 잎과 꽃으로 집이 전부 뒤덮일 것 같았습니다. 조금 어두워진 현관에 앉아, 덩굴이 만든 녹색 커튼 뒤에서 밖을 지나는 행인들을 보는 게 꽤 좋았습니다.

"집이 엉망진창인 게 감춰져서 딱 좋네."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습니다.

가을에는 코스모스 분홍색과 빨간색 꽃이 그 꽃망울을 맺을 때쯤에는 자벌레가 많이 생겨서 그 벌레를 하나씩 젓가락으로 집어내서 버리는 게 내 역활이었습니다. 아홉 살 때 이사하면서, 채집해뒀던 코스모스 씨를 슬며시 마당에 뿌렸습니다. 

이번에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의 촬영차 찾은 구마모토의 한 주택지에서 코스모스가 모여 자라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됐습니다. 가옥은 이미 사라졌지만, 깨진 담으로 둘러싸인 정원의 한편에서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아마 여기에 살던 가족 중 누군가가 이사할 때 뿌렸겠네, 라고 확신했습니다. 

이곳에 살던 가족의 지금까지와, 이사한 곳에서 전과는 다른 형태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지금 이후, 현재 진행형인 지금 이외의 그 시간에 대해 주인공 소년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그런 장면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며 촬영했습니다. 

휴식시간을 이용해 아이들과 어울려 코스모스 씨를 받아, 갖고 있던 프리스크 사탕 케이스에 넣어 도쿄로 가져왔습니다. 소년 시절 우리집엔 없었던 하얀색 꽃의 씨도 섞여 있었으니, 어쩌면 올가을에는 세 가지 색의 꽃을 즐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코스모스

                 - 이 해인 -

몸달아 기다리다
피어오른 숨결

오시리라 믿었더니
오시리라 믿었더니

눈물로 무늬진
연분홍 옷고름
남겨 주신 노래는
아직도 맑은 이슬

뜨거운 그 말씀
재가 되겐 할 수 없어

곱게 머리 빗고
고개 숙이면
바람 부는 가을 길
노을이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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